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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4
황태자라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게 용서될 줄 알았다.
심한 뻐드렁니도, 여드름이 많아도 괜찮았다. 얼굴은 금방 적응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꼬맹이라니?
이른 아침부터 르바인 저택으로 방문한 황실 시종이 들고 온 것은 붉은 벨벳으로 감싸진 초상화였다.
그 붉은 벨벳 천을 벗겨 내자 드러난 것은 청년의 형상이 아닌 맹랑한 표정의 꼬맹이였다.
언뜻 보아도 초등학생? 많아 봤자 중학생?
심지어 손에 사탕까지 들고 있다니.
“꼬……마?”
저도 모르게 뇌를 거치지 않고 혀를 바로 거쳐 나온 자신의 말에 놀란 미뉴에트는 입을 황급히 막았다.
“흠흠, 꼬마……라니요.”
“아니. 그러니깐 황태자 전하께서…….”
어리시다? 동안이시다? 젊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꼬꼬마 신랑이세요? 이게 맞는데.
적당한 단어를 구하지 못한 미뉴에트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건 아니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미뉴에트는 간절한 눈빛으로 시종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이것보단…….”
“이것……보단?”
“나이가 드셨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당연히 이것보단 나이를 드셨……겠죠.
연하남 수준이 아닌 범죄의 영역으로 들어온 나이 차에 아찔했지만, 미뉴에트는 애써 초상화를 들고 온 시종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그래도 머릿속이 어지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먼저, 조선 시대처럼 이 세계에서는 꼬마 신랑이 당연한 것인가?
두 번째,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더 모르는 저 꼬맹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인가. 로맨스를 원했지, 육아물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암담한 현실을 맞닥뜨린 미뉴에트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 갔다.
신이시여.
일만 하다 죽은 것도 다 괜찮습니다.
병으로 죽은 안쓰러운 아이의 몸으로 들여보내 주신 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런 핏덩어리와 결혼이라고요?
바르게 자란 자신의 황태자가 자랑스러운지 초상화를 선보이고 뿌듯해하는 시종과 다르게 그것을 바라보는 미뉴에트의 혼란은 점점 깊어졌다.
시종은 황태자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사탕이라며 예쁜 상자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상자를 손에 받자 그제야 미뉴에트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렇게 가다간 정말 꼬맹이랑 결혼하겠어!
“저 죄송하지만…… 초상화를 도로 가져가 주세요.”
* * *
<황실의 청혼을 거부한 르바인가>
시내 중앙에 있는 카페는 사람들로 붐볐다. 미뉴에트는 의상실로 외출하는 리리안느를 따라 시내로 나왔던 참이었다.
미뉴에트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구매했던 신문을 읽어 내려갔다.
……르바인 가문의 장녀 미뉴에트 르바인 양은 손수 2m가 족히 넘는 초상화를 저택의 문밖으로 내놓으며 청혼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손수?”
리리안느는 미뉴에트가 들고 있던 신문을 슬쩍 넘겨 보다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손수? 이 기자가 언니의 거절 의사를 확실히 밝히고 싶었나 보네. 어떻게 그 무거운 초상화를 언니가 혼자 들었다고 쓰는 거야?”
그저 초상화를 도로 가져가 달라는 말.
그리고 청혼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는 말.
그 정도뿐이었는데, 기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미뉴에트가 진저리치며 황실 시종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낸 것처럼 와전되었다.
“아……. 그런데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기사를 보신다면 퍽 기분이 상하시겠는걸?”
리리안느가 능숙하게 차를 시키면서 말을 덧붙였다. 리리안느의 말에 미뉴에트의 마음 또한 무거워졌다.
분명 초상화에서 보였던 꼬마의 나이라면 사춘기로 감정의 늪에 허덕일 시기일 게 분명했다.
“그러게……. 미안하네.”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기사가 과장되었을진 모르겠지만, 언니 의사는 제대로 밝힌 거잖아.”
[미안하구나…… 얘야. 넌 데뷔탕트에 나오기에 너무 나이가 많단다.]
황실 시종을 돌려보낸 후 미뉴에트가 백작 부부에게 한 말은 자신의 신랑감은 스스로 고르겠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문제 해결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야망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도회를 위해 몇 벌의 드레스가 더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한 리리안느 덕에 전보다 더 부산스럽게 미뉴에트를 살피는 백작 부부의 손길에서 벗어나 시내로 나왔다.
“사교계에 대해서 아무리 모른다 해도, 언니 나이가 나랑 함께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는 아니지.”
리리안느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럼 난 어떻게 하지.”
비아냥거리는 동생의 태도에도 유능한 선생님에게 대답을 기대하듯 미뉴에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리리안느가 아니었다면 백작 부부가 이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 밉살스러운 말만 하는 그녀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귀여운 면도 많았고.
“응? 데뷔탕트에는 함께 못 가더라도 나랑 같이 무도회에 가면 되지. 사교계 데뷔 좀 못 했다고 무도회도 못 가는 백작 영애라니. 말이 돼?”
“……그래도 될까?”
“안 될 게 어딨어.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마. 언니가 르바인 가문이라는 건 잊고 사는 거야? 어차피 언니가 병상을 털고 일어났다는 건 온 비스크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니깐. 그게 데뷔나 뭐가 다르겠어.”
스스로 아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고 생각한 리리안느는 다시 장미꽃 문양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아무리 정략결혼이 옛날 방식이라 나는 싫다고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혼처였을 텐데. 왜 안 하겠다고 하는 거야? 그냥 결혼하지 그래?”
리리안느의 물음에 미뉴에트는 난감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 양심상, 취향상. 저 꼬마 신랑을 데리고 원하던 로맨스는 그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기에.
“취향이 아니라.”
라고 빠르게 말했다.
“흠, 취향이 아니라……. 평판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안이 처지는 것도 아니고. 언니 기준이 이렇게 높을 줄 몰랐어. 아, 뭐 나라도 정략결혼은 정말 진저리나게 싫지만.”
리리안느는 말을 끝내자마자 의자 위에 놓인 몇 개의 상자 중 제일 작은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금색 자수로 마네트 부인의 의상실이라 적힌 리본이 풀리며 초록색 장식이 달린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네트 부인이 리리안느의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어울린다 추천해 준 물건이었다.
미뉴에트의 몸에 들어와 처음으로 나온 바깥 구경이었다. 유럽 같기도 하고 중세 판타지 소설에 나올 것 같기도 한 거리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리리안느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마네트 부인의 의상실뿐이었다.
미뉴에트는 자신이 누워 있는 동안 수많은 재단사들이 저택 문이 닳도록 들락날락했지만, 하급 귀족들이 방문하는 의상실까지 방문해 예쁜 아이템은 모조리 싹 쓸어 가는 리리안느의 꼼꼼함에 감탄했다.
대체 데뷔탕트에 몇 벌의 의상이 필요한지 의문을 내비친 미뉴에트에게 리리안느는 한 수 알려 주겠다는 듯 말했다.
[이건 전쟁이야, 언니. 내가 못 입더라도 이런 예쁜 아이들을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게 둘 순 없지.]
리리안느의 저런 사치라면, 아무리 비스크 제국에서 부유하기로 손꼽히는 르바인 가문이라도 몇 해 안에 망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미뉴에트는 르바인 백작이 자신이 아닌 리리안느의 결혼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생각했다.
“리리안느 르바인 양, 안녕하셨습니까.”
근사한 턱선을 가진 신사가 리리안느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머, 여기서 뵙네요. 안녕하세요, 로리 스트라이버 경.”
자세를 고쳐앉은 리리안느는 로리를 올려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리리안느 양을 이렇게 우연히 시내에서 만나게 된다니 올해의 운을 다 써 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요.”
아까부터 자신들을 쫓아 카페까지 따라온 것이 분명한 이 청년은 ‘우연히’라는 말을 강조하며 리리안느의 기분을 즐겁게 했다.
“저와의 만남으로 올해의 운을 운운하신다니, 스트라이버 경의 올해 목표가 소박하시네요.”
“소박하다니요. 리리안느 양 자체가 제게는 황금보다 마석보다 대단한 존재인걸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끌어내자 리리안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흘렀다.
“그런데 이쪽의 숙녀분은?”
“제 언니 미뉴에트예요.”
“아, 미뉴에트 르바인 양이시군요. 쾌차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르바인가의 백합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백합보다 더 아름다우신걸요.”
로리는 사교 클럽의 신사들에게 소문이 무성했던 이 여인의 미모를 찬찬히 묘사해 줄 요량으로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는 과연 르바인 가문의 핏줄이라며 감탄했다.
이미 데뷔도 전부터 사교계의 뜨거운 이슈로 자리 잡은 리리안느가 비스크 황국의 수도 이벨리아의 세련됨을 보여 주는 미녀라면, 다소 아담한 느낌의 장녀 미뉴에트는 중세 삽화집에 나오는 고전적인 가녀림을 가진 미인이었다. 오목조목 단정한 이목구비와 다르게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가 묘하게 대비되어 더욱 눈길을 끄는 외모였다.
“스트라이버 경?”
자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것이 세상 최고의 악몽이라던 리리안느는 미뉴에트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로리 스트라이버의 경종을 울렸다.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아, 물론, 리리안느 르바인 양보다 아름다운 꽃이란 있을 수 없죠.”
스트라이버는 기꺼이 이번 데뷔탕트에서 리리안느의 수많은 구혼자 중 하나가 되기를 자처했기에, 그가 주목할 사람은 그녀의 언니가 아니었다.
심지어 황태자의 청혼을 받은 여인이 아닌가.
외모 √
가문 √
패션센스 √
로리 스트라이버가 자신을 향해 다가올 때부터 리리안느의 머릿속은 리스트를 하나하나 점검하느라 바빴다.
지조…….
아쉽네.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보다니.
리리안느는 머릿속에서 펜을 집어넣으며, 한 청년이 가질 법했던 기회를 뺏어 들었다. 리리안느의 리스트에서 로리 스트라이버 이름 위에 까만 빗금이 쳐지는 순간이었다.
“아, 리리안느 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영애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
“어머, 선물이라뇨?”
“리리안느 양을 만날 날을 고대하며 제가 마차에 고이 모셔 놓은 선물이지요. 신대륙을 떠나는 상인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구했습니다.”
“어머, 친절하시기도 하셔라. 스트라이버 경께서 그런 정성을 들이셨는데, 제가 받지 않는다면 결례가 될 수 있겠네요.”
리리안느는 로리 스트라이버의 이름 위에 치던 빗금을 살짝 걷어 냈다.
한 번 더 기회를 줘도 나쁘지 않겠어.
“그렇다면, 잠시 제가 리리안느 양을 빌려 가겠습니다.”
미뉴에트는 기꺼이 그러라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리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리 스트라이버의 팔짱을 끼고 그녀의 앞에서 멀어졌다.
다들 연애를 하는구나.
미뉴에트는 멀어져 가는 리리안느와 로리 스트라이버 경을 바라보면서 읊조렸다.
꼬맹이 황태자의 초상화를 받아 든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새롭게 정해진 듯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나도 연애하고 싶어.